비참한 현실에서 피워낸 웃음…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핀란드 거장 카우리스마키 감독 신작…20일 개봉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아무나 무대에 올라 노래할 수 있는 가라오케 바에서 누군가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친구를 따라 이곳에 온 안사(알마 포이스티 분)가 처음 보는 남자 홀라파(주시 바타넨)와 눈이 마주친다.

두 사람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황급히 눈을 딴 데로 돌린다. 그러다가 또 눈이 마주치고,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한다.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안사와 홀라파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헬싱키의 가난한 노동자다.

마트에서 일하는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가져가거나 배고픈 사람에게 줬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사실 확인이나 이의 제기 같은 절차도 없다. “당장 해고”라는 사용자의 말 한마디로 끝이다.

건설 노동자인 홀라파는 술에 절어 산다. “우울하다”는 홀라파의 말에 동료가 “왜?”라고 물으면, 그는 “과음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왜 마셔?”라고 또 물으면 “우울해서”라고 한다.

공사장의 기계가 오래돼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불평해도 사용자는 모른 척한다. 결국 사고가 나 홀라파가 다치자 사용자는 모든 게 술 때문이라며 그를 해고한다.

이렇게 안사와 홀라파의 삶은 비참하다. 이들이 가끔 듣는 라디오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마치 삶의 비참함이 보편적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비참한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그저 담담히 보여준다. 영화의 담담한 시선을 대변하는 건 배우들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안사와 홀라파는 화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들은 딱딱한 얼굴로 재치 있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무표정한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폭소를 터뜨릴 만한 유머는 아닐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머금고 영화를 보게 된다.

비참한 현실에서 오는 절망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이 영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유기견 한 마리를 입양한 안사가 강아지 이름을 ‘채플린’으로 짓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대사 대신 노래가 등장인물의 마음을 보여줄 때가 많다.

안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린 홀라파가 괴로워할 때 라디오에선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싶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홀라파의 연락을 기다리는 안사는 “왜 아무 대답이 없나요”라는 노래를 듣는다.

늦가을 헬싱키의 골목과 상점, 공원 등이 담긴 영상도 아름답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지난 5월 제76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은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기도 했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 영화에서 보듯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의 전작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는 프롤레타리아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희망의 건너편'(2017)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6년 만에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관객들에게 돌아왔다.

이 영화에 나오는 강아지는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포르투갈에서 입양한 유기견으로, 칸 영화제 출품작에 나온 개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개에게 주는 ‘팜 도그 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20일 개봉. 80분. 12세 관람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ljglor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