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중 감독 “필름 지키려 해외로 도망…차라리 날 죽이라 해”

전두환 정권 검열 피한 ‘태’ 37년 만에 복원…”민족 정체성 담아”

정일성 촬영감독 “6·25보다 힘든 현장…영화엔 ‘격조’ 있어야”

연합뉴스와 만난 하명중 감독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영화 ‘태’의 하명중 감독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2.17 jin90@yna.co.kr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하명중 감독이 1986년 내놓은 영화 ‘태'(胎)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숨은 명작이다.

천승세의 중편 소설 ‘낙월도’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외부와 단절된 섬에 사는 민초들을 그렸다. 권력을 독점한 부자들로 인해 평범한 백성의 삶이 날로 피폐해지자, 참다못한 젊은 어부 종천(마흥식 분)이 이들을 처단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 같은 스토리에 정부를 향한 비판이 담겼다고 보고 상영을 방해했다고 제작진은 회고했다. 결국 영화는 개봉 후 일주일도 채우지 못하고 극장에서 내려갔다.

그러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관 중이던 필름을 최근 디지털 리마스터링하면서 ‘태’가 다시 한번 태어났다. 박찬욱, 정지영, 이준익, 정윤철 등 후배 감독들은 서로 합심해 극장에서 특별상영회를 열었다.

37년의 기다림 끝에 ‘태’를 관객들에게 선보인 하명중(76) 감독과 정일성(94) 촬영감독을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하 감독은 “‘태’를 다시 보고서 내가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고 젊은 에너지도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 감독은 “이 영화가 뒤늦게라도 재조명돼 감사할 따름”이라면서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 조금만 일찍 죽었으면 이런 좋은 일도 보지 못했을 것 아니냐”며 웃었다.

하 감독이 ‘태’를 연출하게 된 계기는 1980년 우연히 한 해외 매체에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다. 큰 충격에 휩싸인 그즈음에 소설 ‘낙월도’를 읽게 됐다. 그는 낙월도의 모습이 우리나라와 겹쳐 보였다고 한다.

“4·19 혁명에 참여했던 중학생 시절부터 왜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해왔습니다.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을 보고서는 이게 과연 내 나라인가 의문이 들더군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민족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내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려 했어요. 한국인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그는 “‘태’는 우리를 찾는 영화일 뿐”이라며 “이 영화를 탄압한 사람들은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화 ‘태’의 정일성 촬영감독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영화 ‘태’의 정일성 촬영감독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2.17 jin90@yna.co.kr

극 중 종천은 하 감독의 분신이다. 소설에서 종천은 부자들에게 굴복하지만, 영화에선 권력에 맞서 싸운 뒤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연인 귀덕(이혜숙)이 종천의 아이를 낳는 후반부 장면으로는 어둠 속에서도 끝끝내 피어나는 희망을 암시한다. 자신의 세대를 끊어내고서라도 새 시대를 맞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하 감독은 설명했다.

정 감독 역시 “이 땅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땅을 지키는 사람”이라면서 “‘태’는 그런 한국인의 철학이 담긴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 감독이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여러 차례 작품을 함께했지만, 감독과 촬영감독으로 호흡한 건 ‘태’가 처음이다.

정 감독은 ‘낙월도’를 영화로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하명중이 미쳤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성’으로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작업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태’의 아름다우면서도 애연한 색감, 과감한 원 테이크와 롱숏, 역동적인 360도 촬영은 정 감독의 손에서 탄생했다.

하 감독은 “테크니션이 아니라 아티스트가 필요했다”며 정 감독만이 ‘태’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촬영감독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정 감독은 직장암으로 대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안을 수락한 뒤 전북 부안군 왕등도로 향했다.

두 감독을 포함한 스태프와 배우진 60여 명은 두 달간 이곳에 갇히다시피 한 상태로 영화를 찍었다. 숙소는 습기가 가득한 폐교였고, 식사하려면 왕복 1시간 30분을 등산해야 했다. 씻을 물조차 없어 온몸에서는 악취가 났다.

하 감독은 “누구 하나라도 헤엄쳐서 도망갈 것 같았다”면서 사고라도 벌어지진 않을까 날마다 노심초사했다.

“6·25 때보다 더 힘든 현장이었다”고 그때를 회상한 정 감독은 스태프들을 달래기 위해 밤마다 ‘영화 교실’을 열었다.

“이러다가 영화를 못 끝내겠구나 싶었어요. 그때 영화 강의를 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지요. 왜 ‘태’라는 영화를 찍어야 하고, 어떻게 이 작품에 임해야 하는지부터 한국·중국·유럽·미국·일본 영화사도 가르쳤어요. 일주일쯤 지나니까 스태프들 눈빛이 달라진 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생긴 거지요.”

하명중 영화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영화 ‘태’의 하명중 감독(오른쪽)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2.17 jin90@yna.co.kr

촬영 당시 정 감독은 57세로 건강도 온전치 않았지만 말 그대로 투혼을 발휘해 작품을 끝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위 배에서 핸드헬드로 촬영하고, 태풍이 오던 날에는 조수들에게 다리를 붙들라고 한 뒤 카메라를 잡았다. “100% 원시적 수작업”이었다.

배와 고속버스를 이용해 필름을 서울 현상소에 보낸 뒤에는 밤마다 전전반측했다. 혹시나 필름이 유실되지는 않을지, 의도한 대로 영상이 안 찍힌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크랭크업하고 나자 전두환 정권의 검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당시 공연윤리위원장은 문화계에 호의적인 인물이었고 ‘태’를 무삭제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하 감독은 그러나 언제라도 영화가 난도질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필름을 들고 무작정 해외로 도망쳤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한 뒤에는 정부도 쉽사리 영화에 손댈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다.

“처음엔 베를린으로 갔어요.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영사가 와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서 다시 파리로 향했지요. 집에 전화했더니 경찰이 와 있으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검열 통과해준 위원장도 해고됐다면서요.”

하 감독이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낯선 이들의 미행이 붙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싸워야겠다고 결심하고 귀국했다. 필름은 하 감독이 입국 심사를 마치기도 전에 압수됐다.

“새로 취임한 위원장을 찾아갔더니 이걸 왜 꼭 틀려고 하느냐면서 노트를 딱 펴고는 이 부분, 저 부분을 다 자르라고 해요. 어떤 피해도 각오하겠냐고 물으면서요. 저는 필름에는 절대 손 못 대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했어요. 그러고서 필름을 도로 받아왔지요.”

그때부터 정부의 ‘2차 작전’이 시작됐다고 하 감독은 말했다. 영화 간판과 광고 심의를 차일피일 미뤘고, 극장에는 경찰을 풀어 ‘태’를 관람하려는 학생들의 신분증을 검사했다. 대종상영화제 관계자는 일부러 조도를 낮춰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를 못 보게 했다.

그는 10여년이 흐른 뒤에야 하 감독에게 “하길종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영화를 아무도 못 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신 작품을 망쳤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고(故) 하길종(1941∼1979) 감독은 하 감독의 형으로, 유신 정권을 비판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으로 유명하다. 동생에게 영화감독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일찍 알아본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하 감독에게 연출해보라고 권했다.

영화 ‘태’의 하명중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영화 ‘태’의 하명중 감독(오른쪽)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12.17 jin90@yna.co.kr

하 감독은 형의 유언을 받들어 승승장구하던 배우의 길을 접고 ‘엑스'(1983)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두 번째 연출작 ‘땡볕'(1984)은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그때는 오로지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인류에게 보여주고 소통하는 게 삶의 목적이었다”며 ‘태’도 이 같은 예술가적 욕심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정 감독 역시 “흥행도 안 되는 걸 왜 만드느냐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강조했다.

“살면서 찍은 138편 작품 중에서 나를 평생 지배한 건 성공작이 아니라 30∼40편가량의 실패작이더군요. 기왕 영화를 찍는다면 작가 정신이 살아 있는 영화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쉰 살 이후에 비로소 하게 됐어요. ‘태’ 역시 감독이 추구하는 정신을 어떻게 이미지로 형상화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한 작품이고요. 격조를 놓치면 평범한 영화가 됩니다. 영화에서는 모더니즘, 리얼리즘, 형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격조입니다.”

영화 ‘태’ 특별상영회
왼쪽부터 김영동 음악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하명중 감독, 배우 마흥식
[촬영 오보람]

ramb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