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여인들 풍속을 화폭에 재현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는 생몰연도나 활동이력 등에서 제대로 알려진 게 없는, ‘정체불명의 신비’ 신윤복이다.
대표작인 ‘미인도’부터 ‘단오풍정’, ‘월하정인’ 등에서 여러 여인 모습을 따라잡을 수 있다.
신윤복 이전 다른 화가들 회화에선 여인이 그려진 모습을 찾기 무척 힘들다.
여성으로서 수작을 많이 남긴 신사임당도 여인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초충도(草蟲圖)에 집중한 것도 취향이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 탓으로 본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그것도 노동하는 여인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을 통해 시대가 거꾸로 흐른 듯한 감상에 젖는다.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가 17세기 후반이나 18세기 초에 그린 ‘나물 캐기’라고 불리는 작품인데,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 19세기에 그린 그림으로 추측했을 정도다.
봄날이다. 비탈진 들에서 편한 옷을 입은 여인네들이 나물을 캐고 있다. 치마를 걷어 올린 모습이나 머릿수건을 두른 모습 등이 파격적이다. 군데군데 보이는 돌멩이와 경사 급한 비탈은 ‘척박함’을 떠오르게 한다. 배경 높은 산과 날아오른 한 마리 새는 그림에 힘을 더해준다.
‘노동하는 서민 여성’인지 ‘소일하는 양반댁 아낙네’인지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으나, 상상이 아닌 실제로 본 모습을 그린 것임은 확실하다.
윤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다. 비록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가문이었지만, 전남 해남지역 유력 양반이었다. 그런 그가 남존여비가 극심하던 시대에 이런 풍속화를 그렸다니 매우 놀랍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고향에 칩거하며 주변의 자연과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돌아봤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해본다.
그의 아들 윤덕희(1685~1776)도 문인화가였다. 그 역시 대단히 귀한 작품을 남겼다. 또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 그것도 책을 읽는 모습을 그렸다.
여자 독서 모습을 탐색한 우리 그림으로는 유일한데, 크기가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그림이다.
또 이어진다. 윤덕희 아들 윤용(1708~1740)이 그린 ‘나물 캐는 여인’이다. 할아버지 그림에 감흥 받아 그린 그림임이 분명해 보인다. 뒷모습으로 그렸지만, 머리에 쓴 두건과 걷어 올린 치마 등이 윤두서 그림과 거의 같다. 왼손에 든 호미가 눈에 확 띈다. 노동에 대한 의지가 굳건하게 느껴진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윤두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길이 남아 있다.
정면을 강하게 응시하는 두상(頭相) 초상인데, 매서운 눈초리와 굳게 다문 입, 길게 늘어진 수염에서 짙은 자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서양 회화에서 첫 자화상으로 언급되는 르네상스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자화상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윤두서, 덕희, 용으로 이어지는 3대 해남 윤씨는 이처럼 귀하디귀한 여인들 풍속화를 남기고, 사실성에 입각한 자화상을 그렸다. ‘참된 현실’을 그렸다.
우리 예술사에 기여한 바가 작지 않다. 정치에선 소외됐다고 할지라도, 미술사에선 불후의 인물들이다.
doh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