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가득 뿜어져 나오는 위스키향…소설 ‘광인’

드라마 ‘사랑의 이해’ 원작자 이혁진의 신작 장편

삼각관계 세 남녀의 파국으로 치닫는 사랑…술과 음악의 향연은 덤

[민음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플루트 교습소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준연과 해원은 40대 싱글 남성이라는 공통점에 위스키와 음악이라는 취향까지 공유하며 금세 친해진다. 그러나 준연의 친구인 위스키 양조장의 상속녀 하진이 해원의 마음속에 차츰 들어오면서 둘의 관계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주식으로 큰돈을 번 해원은 위스키 사업을 준비하는 하진을 돕고 하진 역시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둘의 관계가 깊어지지만, 그럴수록 하진과 준연의 관계에 관한 해원의 불안도 커져만 간다. 어느덧 삼각관계가 되어버린 세 남녀의 감정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장편소설 ‘광인'(민음사)은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 질투와 욕망의 이야기를 위스키와 음악, 돈을 매개로 그려낸 작품이다.

학벌·직급·경제력 등의 격차 앞에 사랑을 망설이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청춘남녀의 현실을 그려 동명의 드라마로도 방영된 ‘사랑의 이해’, 조선소를 배경으로 기업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린 데뷔작 ‘누운 배’ 등을 쓴 소설가 이혁진(43)의 신작이다.

‘광인’의 세 중심인물 사이에서 위기와 갈등의 핵심은 셋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 하진이다.

위스키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위스키의 세계에 탐닉했던 해원은 맛을 감별하고 표현하는 데 천재적 능력을 보인다. 음악 공부를 위해 해외 유학을 떠났지만 위스키의 매력에 더 빠져 돌아온 하진은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양조장을 물려받아 자기만의 독자적 위스키를 만들고 말겠다는 꿈을 키운다.

사랑이 점차 광기로 치닫는 과정을 로맨스와 스릴러, 심리물 등의 특징을 골고루 버무려 쓴 이 소설을 어떤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랑의 파괴적 속성과 생의 잔혹함을 다룬 이 소설이 실은 작가의 술과 음악에 대한 찬가라는 점이다.

세 인물의 우정과 사랑이 뒤틀리면서 인물들이 소설 제목처럼 ‘광기’에 사로잡히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와중에 위스키와 음악에 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위스키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햇살에 말린 것처럼 꾸덕꾸덕한 복숭아 향, 면보에 방울져 떨어지는 꿀처럼 향긋한 단맛, 코끝을 톡 치는 것 같은 레몬 향과 높은 삼나무 아래에 선 것처럼 푸르고 서늘한 나무 향. 맨 처음 준연과 함께 마셨던 하진의 위스키였다.” (91쪽)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위스키 마니아들이 늘고 있다는데, 위스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글로 풀어낸 술 이야기를 읽다가 금세 침이 고일 법도 하다.

동시대 작가들이 내놓는 장편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트렌드를 거슬러 이 소설은 675쪽이라는 두툼한 분량을 자랑한다. 흔히 말하는 ‘벽돌 책’ 수준이다.

그래도 각자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세 남녀의 치열한 투쟁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소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어쩌면 이 소설은 사랑에 앞서 아름다움에 관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소설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무용하다고,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중략) 아름다운 걸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름다운 걸 만들 수밖에 없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능력이야.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오직 신만을 닮은 우리의 능력.”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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