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 영화에 홀드백 의무…모태펀드 출자사업 공고에 반영

영화계 “산업 위축 막는 최소한 장치” vs OTT업계 “시청자 선택권 제한”

문체부 “법제화 방안은 영화계 합의안 도출돼야 검토”

‘천만’ 돌파 영화 ‘서울의 봄’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이영재 기자 = 정부가 최근 영화 분야 지원 사업 조건에 ‘홀드백'(Hold Back) 준수 의무를 부과했다.

홀드백은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가 IPTV,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에 유통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두는 것을 뜻한다.

정부가 지원 사업을 시작으로 홀드백을 의무화하려는 움직임에 영화계와 OTT 업계 등은 이해관계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영화계는 홀드백이 영화산업을 살리는 제도라며 필요성을 주장하는 반면, OTT 업계는 시청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서울 시내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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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계 지원 펀드에 홀드백 준수 규정…”이달 구체적 조건 공지”

4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정부가 조성하는 모태펀드 영화계정 관련 출자사업 공고에 ‘영화 분야 투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홀드백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를 담았다.

지난해 11월 개봉지원펀드에 시범적으로 홀드백 의무를 적용한 데 이은 방침이다. 당시에는 OTT 공개 유예 기간을 극장 개봉 이후 4개월로 두고, 제작비 30억원 미만 영화는 예외로 하는 규정을 뒀다.

이번 모태펀드는 총 650억원 규모로 2종을 조성하는데, 홀드백 조건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문체부는 30억원 미만 영화를 제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며 유예기간(4개월 또는 6개월) 등 구체적인 요건은 업계와 논의를 거쳐 이달 공지한다는 계획이다.

모태펀드 영화계정 2024년 출자사업 계획 공고에 담긴 홀드백 준수 의무
[한국벤처투자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문체부는 지난해 9월 영화계와 한국영화산업 위기극복 정책협의회를 구성해 홀드백과 미개봉작 지원 등 영화산업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제작·상영·투자배급사 단체, IPTV 협회, 영화진흥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협의체의 궁극적인 목표는 홀드백을 포함해 여러 제도 개선과 관련한 업계의 자율 협약”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영화계의 홀드백 논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극장 수입 급감 등 영화 산업이 침체일로를 겪으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는 개봉 영화가 통상 1~3개월, 짧게는 2~3주만에 IPTV와 OTT 등에 풀리고, TV나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극장 상영 중에 IPTV 등에서 ‘동시 상영’하거나, 극장 개봉을 안 거치고 OTT로 직행하는 영화도 늘어났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영상산업 도약 전략’ 발표에서 “창작자와 플랫폼의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면서 “홀드백 제도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분명히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문체부는 영화계와 OTT 업계가 주목하는 홀드백 법제화에 관해선 업계 합의안이 도출돼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홀드백 도입 필요성에 공감하는 영화계 안에서도 제작사와 투자배급사 등 선결 조건에서 견해차가 있다”며 “(법제화 추진에 앞서) 협의체에서 산업 관계자들이 자율적인 협약을 맺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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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계 “극장 중심 영화산업 보호에 홀드백 필요”

영화관, 배급사, 제작사 등을 중심으로 한 영화업계는 대체로 홀드백 의무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내 영화산업의 극장 의존도가 높은 만큼 홀드백으로 극장의 위축을 막고 영화산업 전반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2022년 기준 1조7천억원 규모인 국내 영화산업 전체 매출에서 극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68.0%에 달했다. IPTV와 OTT를 포함한 극장 외 시장 매출은 26.6%에 그쳤고, 해외 수출이 5.4%였다.

배급사와 제작사 등이 영화로 수익을 내기 위해 극장에서 흥행하는 데 주력하게 되는 구조인 셈이다.

영화 감상 플랫폼이 다양해져 극장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긴 어렵더라도, 극장이 급격히 힘을 잃어 영화산업 전체가 위축되는 걸 막을 최소한의 장치로 홀드백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한 극장 관계자는 “영화산업의 주된 수익원은 극장”이라며 “한국 영화산업의 재도약을 위해선 홀드백과 같은 제도를 통해 영화 유통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홀드백으로 극장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는 경제적 고려만 깔린 게 아니다. 영화란 기본적으로 다수의 관객이 거대한 스크린 앞에 모여 감상하는 것이란 관점에 기반을 둔 문화적 고려도 작용한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집에서 혼자 TV나 컴퓨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과 달리 극장에선 영화 관람이 공동의 체험이 되고, 때로는 감독과 배우 등이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GV)로 활발한 토론도 이뤄진다. 이런 문화는 한국 영화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영화 업계에서도 조금씩 입장 차이는 있다.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할 경우 IPTV와 OTT 등으로 빨리 플랫폼을 갈아타는 게 나을 수 있는데, 홀드백에 묶이면 극장에서 스크린 배정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홀드백 기간이 끝나 다른 플랫폼으로 넘어가더라도 이미 오래된 영화라는 낙인이 찍혀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워진다.

권영락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운영위원은 “스크린 배정에서 밀려난 중소형 영화들은 빨리 다른 데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데 일괄적으로 홀드백이 정해지면 수익을 내지도 못한 채 관객들에게 잊힐 수 있다”며 “홀드백 의무화를 할 경우 이런 부작용을 막는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선 홀드백을 도입한다면 소수의 잘 나가는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현실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넷플릭스와 같은 구독형 서비스인 SVOD와 달리 편당 결제 방식인 TVOD와 같은 플랫폼에 대해선 홀드백을 짧게 설정하는 등 유연한 적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문체부, OTT 산업 현장 간담회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OTT 산업 현장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2023.12.15 mjkang@yna.co.kr

◇ OTT 업계 “시청자 선택권 제한 우려”

OTT 업계에서는 홀드백이 시청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규제라고 주장한다.

시청자는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도 OTT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볼 수 있기를 원하는데, 홀드백을 의무화해 일정 기간 극장 상영을 거치도록 한다면 시청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인위적 규제가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도 거론된다.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를 일정 기간 묶어둘 경우 불법적 채널로 유통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OTT 업계는 홀드백 의무화가 추진되면 그에 따른 이익이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한 대형 영화관에 집중될 수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홀드백 의무화는 다수 소비자의 편익을 희생시켜 소수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는 반(反)시장적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홀드백에 묶인 한국 영화가 OTT로 못 넘어오는 동안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외국 영화를 더 많이 보게 되고, 이는 한국 영화의 관객층을 잠식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극장에서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다른 플랫폼으로 빨리 갈아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홀드백으로 이런 길이 막히면 한국 영화의 수익성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면서 투자를 유치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OTT 업계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홀드백의 유연한 적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홀드백 자체를 반대할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최정화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홀드백은 영화산업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걸 막기 위해 필요하다”며 “예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예외 조항과 같은 것으로 해결하는 쪽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mimi@yna.co.kr